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무 덴노 (문단 편집) == 상세 == 진무 천황은 [[일본인]]의 비조(鼻祖)로 통한다. '''[[일본 황실]]의 시조'''이자 '''일본 역사상의 웬만큼 걸출한 모든 인물들의 비조'''로 그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진무 덴노가 나오기 때문이다. 일례로 백제계 도래인 계통의 모후를 두었던 제50대 [[간무 덴노]]의 현손자인 '''타이라 타카무네오'''로부터 시작된 '''[[타이라]] 가문'''(헤이시)의 경우, [[헤이케]] 정권의 개창자인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비롯한 모든 타이라 사람이 진무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타이라 가문의 영원한 맞수인 '''[[미나모토]] 가문'''(겐지) 또한 진무의 자손으로,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최초의 미나모토'인 '''미나모토 마코토'''를 시작으로 제52대 [[사가 덴노]]의 황자 중 17명이 하사받은 '''사가 미나모토 가문'''과 사가 미나모토 가의 후손들에서 분파된 키타베 家, 히로하타 家, 히가시산조 家, 요코가와 家, 시조 家, 요인 家, 야기우메 家, 다나카 家, 니시시치조 家, 다케다 가문이 그 후손들이었다. 또 성을 하사받은 황자 중 12번째인 '''미나모토 토오루'''가 사가 미나모토 토오루류의 시조로서 거기서 분파된 미타 家, 와타나베 家, 마츠우라 家, 카마치 가문 또한 진무의 후손들이었다. 그리고 제53대 [[닌묘 덴노]]의 자손에게 하사된 '''닌묘 미나모토 가문'''과 그 분파들인 하나부사 가문, 타테이시 가, 타테이시 가문의 분파인 우루시마 家, 키타야마 家, 스가 家, 우루시마 家, 와다 家, 나츠메 家, 타나카 家, 타치카와 家, 모리 家, 오오나 家, 칸부미 家, 이치마시마 가문도 진무의 후손들이었다. 제55대 [[몬토쿠 덴노]]의 후손들에게 하사된 '''몬토쿠 미나모토 가문'''과 그 분파인 노로 家, 사카도 가문도 진무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제56대 [[세이와 덴노]]의 6남 '''사다즈미 친왕'''의 두 아들 '''미나모토 츠네모토'''와 '''미나모토 츠네오'''가 하사받은 '''세이와 미나모토 가문'''이 특히 유명한데, 대표적인 인물로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자로 중세 무가 정권 시대의 서막을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겐페이 합전|겐페이 전쟁]]의 레전드급 명장이었던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있다. 세이와 미나모토 가문은 미나모토 가문 중에 가장 분파가 많아서 다 거론할 수 없다. 또 대표적인 후손들이 츠네모토의 손자 '''미나모토 요리노부'''를 시조로 두는 '''카와치 미나모토 가문'''에서 나오는데, 이 가문에서 [[남북조시대(일본)|난보쿠초 시대]]를 풍미한 [[닛타]] 가문과 [[아시카가]] 가문이 나왔고, 특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남조와 대립하며,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무가 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또한 미나모토 요리노부의 8대손이 마츠다이라 가문의 시조였던 '''마츠다이라 지카우지'''였는데, 그의 9대손으로, 마츠다이라 가문[* 카와치 미나모토 가문의 분가인 닛타 가문의 분가]의 당주였던 사람이 바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종결시키고, 세 번째 무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센고쿠 시대의 종결에 크게 이바지한 [[오다 노부나가]] 집안도 아직 자세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천황가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호겐의 난]], [[겐페이 합전|겐페이 전쟁]], [[조큐의 난]], [[남북조시대(일본)|난보쿠초 시대]], [[오닌의 난]], [[센고쿠 시대]]나 [[세키가하라 전투]]는 '''집안 싸움이 된다'''[* 하지만 딱히 이것이 특별하다고 볼 수만도 없는 게 원래 고대에 일어났었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반란 대부분은 주류에서 밀려난 왕족이나 지방 호족이 주도하여 벌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또 그런 지방 호족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왕족인 경우가 많았다. 일단 밀려나긴 했어도 왕족이긴 하니까. 그만큼 기반이 되는 지지층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쉬웠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부여 계통이었던 [[백제]] 부여씨와 [[고구려]] 고씨의 전쟁도 거대한 집안 싸움인 셈이었다. 오늘날에도 [[재벌]]끼리 유산을 두고 싸우거나 그 싸움에서 밀린 재벌의 자손이 갈라져나와 새로운 대기업을 차려 경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천황가를 압박한 미나모토 가문, 아시카가 가문, 도쿠가와 가문이 각각 천황가의 분가, 천황가의 분가의 분가, 천황가의 분가의 분가의 분가가 되기 때문이다[* 족보를 날조하기 쉬운 난세의 인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상을 갈아치울 수 있는 시대였다. 예를 들어 오다 가문이 타이라 가문의 후손을 칭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 때 시작되었다.]. 이러니 아무리 신화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진무 덴노는 일본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무 덴노를 시작으로 [[일본/왕사|일본 역대 천황]]들을 주욱 살펴보다 보면 일본의 웬만한 모든 왕공가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할 사람들은 [[일본/왕사|역대 천황]]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진무 덴노의 형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를 두고 9세기 초 일본 서적이었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신라 국왕과 조상이 같다고 주장했다.[* [[흘해 이사금]] 시기 왜국([[야마토]])의 왕자빈이 된 아찬 급리(急利)의 딸 소생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때문에 일본의 학자들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